어버이날 하루 전인 지난 7일 꽃집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종일 일에 치이다 퇴근길 급하게 꽃바구니를 주문하는 직장인부터 꼬깃꼬깃 접어 둔 용돈을 꺼내 카네이션 한 송이를 사가는 학생까지 방식은 달라도 저마다 어버이날을 기념하고 있었다. 교보문고 핫트랙스와 아트박스 같은 대형 문구점에는 어버이날 기념 편지지가 보기 좋게 전시돼 있었다. '부모님 은혜 감사합니다'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등 봉투에 적힌 문구도 다양했다.
동네 문구점에 들려 편지지를 고르다 보니 밀린 설거지와 집안일을 하고 있을 익숙한 얼굴이 떠올랐다. 카네이션 살 돈 있으면 맛있는 거나 사 먹으라며 애꿎은 핀잔을 주는 한 사람. 집에 돌아와 굽은 허리에 연고를 바르는 한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문득 궁금해졌다. 자식을 낳기 전 당신의 모습은 어땠을까. 허리도 무릎도 쌩쌩하고 머리도 하얗지 않았던 젊은 시절, 당신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 엄마·할머니가 아닌 한 여자로…기록되지 않은 삶에 대한 조명
사회적 기업 허스토리 류소연 대표(30)는 이 같은 궁금증에 기반해 2016년부터 외할머니의 자서전을 써 내려 가기 시작했다. 같은 기간 주승리 팀장(27)은 어머니의 자서전을 만들었다. 허스토리가 '내가 쓰는 엄마의 역사 : 그 여자의 자서전 프로젝트'(이하 자서전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계기다. 7일 매경닷컴은 두 사람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세한 얘기를 들어봤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신의 이름보다는 누군가의 아내, 엄마로 불리게 되잖아요. 역사학도로서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에 관해 쓰는 일을 하고 싶었는데,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더라고요." 류 대표는 프로젝트의 취지를 이같이 설명했다. 아이디어는 단순하면서도 신선했다. 인터뷰하고 싶은 사람을 취재해 자서전을 만드는 것. 다만 핵심은 그간 문헌 기록에서 자주 다뤄지지 않거나 배제된 여성, 특히 '엄마들'의 이야기여야 했다.
류 대표가 인터뷰 대상으로 택한 인물은 황해도에서 태어난 자신의 외할머니였다. 그는 "할머니께 할머니를 인터뷰해서 책을 만들 거라고 했더니 '그걸 누가 보겠느냐'며 코웃음을 치셨다"고 말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자서전으로 쓴다는 손녀의 말이 믿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처음 인터뷰를 하던 날, 류 대표의 외할머니는 손녀의 추궁에 못 이겨 가슴속에 묻어둔 얘기를 조심스레 꺼냈다. 그가 떠올린 기억은 어렸을 적 부모님을 떠나던 순간이었다. 류 대표는 "할머니가 16살이던 때, 전쟁이 빨리 끝날 줄 알고 잠시 피란을 나왔다가 부모님과 생이별을 하신 이야기를 해주셨다"며 "증조할머니를 그리워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처음 보면서 할머니도 누군가의 딸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되기 이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낯설어하는 건 주 팀장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굳게 닫힌 어머니의 마음을 여는 데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어렵사리 꺼낸 이야기보따리 안에는 어렸을 때 받았던 상처부터 디자이너의 꿈을 포기해야만 했던 순간까지 어떻게 눌러 담았는지 모를 한 여자의 일생이 가득 들어있었다. "어머니는 말씀하시면서 때때로 눈물을 훔치기도 하셨어요. 이야기를 들을수록 '왜 이제야 물어봤을까'라는 생각만 들었죠."
◈ 더 많은 목소리를 담기 위해…'엄마 자서전 프로젝트'
류 대표와 주 팀장은 각자가 펴낸 자서전을 시작으로 프로젝트의 불씨를 피웠다. 이들은 더 많은 어머니의 목소리를 전하기 위해 지난해 말 펀딩 사이트 텀블벅에 프로젝트 참여를 독려하는 글을 올렸다. 두 사람이 어설프게 시작한 자서전 프로젝트가 수면 위로 올라온 순간이었다. 프로젝트는 2만원 이상을 기부하면 직접 만든 '인터뷰 키트'를 배송해주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류 대표는 "인터뷰 대상이 남이 아닌 가족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글을 쓰는 게 어려울 수 있다"며 "이를 돕기 위해 키트를 제작했다"고 펀딩 계기를 설명했다.
이들이 만든 키트는 인터뷰 전 준비 과정을 안내하는 '가이드북'과 실제 인터뷰에서 필요한 도구들이 포함된 '워크북', 어머니의 일생을 표로 정리하는 '생애 연보' 총 3가지로 구성됐다.
특히 가이드북에는 인터뷰를 해본 적 없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법한 여러 방법틀이 제시돼 있다.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살려주는 몇 가지 샘플 질문들과 가족이 아닌 인터뷰이로서 어머니를 객관화하는 '거리두기' 연습 등이 이에 해당한다. 또 워크북을 통해서는 앞서 류 대표와 주 팀장 두 사람이 그러했듯 가족 인터뷰가 낯선 이들을 위해 기억탐험 주사위 놀이·마인드맵·질문지 등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줄 활동들도 안내하고 있다. 해당 펀딩은 당초 목표 금액이었던 200만원을 훌쩍 넘기고 약 490만원의 후원금과 함께 성황리에 마무리됐다.
한편 펀딩에 참여한 사람 중 일부는 지난 3월부터 격주마다 허스토리가 운영하는 책방 '달리봄'에서 모이고 있다. 어머니에 대한 지식이 턱없이 부족한 이들이 워크숍이라는 이름 아래 '엄마 공부'를 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러 오는 것이다. 인원은 6~7명 남짓. 류 대표와 주 팀장은 이곳에서 직접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인터뷰에 대한 각종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며 자서전 집필을 돕고 있다. 20대부터 40대까지 연령도, 직업도 다양한 이들은 3시간가량 저마다의 어머니를 떠올리며 그들의 인생을 한 줄 한 줄 써 내려 간다.
워크숍 7주차에 접어든 지금, 이들의 자서전은 막바지를 달리고 있다. 이미 허스토리 공식 SNS에서는 자서전 작업을 함께할 새 기수를 모집하고 있다. 류 대표는 "10주차 워크숍이 끝나고 자서전이 모두 마무리되면 작은 출판 기념회를 열 것"이라며 "기회가 된다면 참여자분들의 어머니들도 초대하고 싶다"고 작게 웃었다. 허스토리라는 이름처럼 '그녀들'의 역사를 알릴 첫 번째 무대가 되는 것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장충동 '태극당' 제과점을 지나칠 때마다 태극당 예식장에서 일했던 추억을 신이 나서 얘기하는 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또 시작됐다'는 표정으로 듣는 시늉도 하지 않던 못난
[디지털뉴스국 이유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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