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 MBN 뉴스 캡처] |
마 전 교수는 연세대 국문학과 졸업 후 동 대학원에서 윤동주 관련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따며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국문학 교수로서 윤동주 시인의 작품 세계를 연구했던 그는 생전 "윤동주처럼 멋진 시인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고 밝히며 윤동주 시인을 동경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후에 "후세 사람들이 나를 변태, 색마, 미친 말로 기억할까 두렵다"며 뜻대로 되지 않은 자신의 인생을 한탄했다.
마 전 교수의 회한 가득한 인생 한가운데에는 '사라'가 있었다.
1977년 '배꼽에'·'망나니의 노래' 등 6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한 그는 1989년에 펴낸 수필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수필집에 자신의 성적인 사상을 담았던 그는 1992년 소설 '즐거운 사라'를 출간하면서 다시 한번 성 관념을 마음껏 펼쳤고 이내 논란의 아이콘으로 거듭났다.
즐거운 사라는 여대생 사라의 자유분방한 성생활을 그려낸 소설로 자신이 다니고 있는 대학교수와 관계를 맺으며 육체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시대상에 비해 다소 파격적인 소재였던 이 소설은 건전한 성 생활을 왜곡한다는 이유로 간행물 윤리위원회 고발로 자진 수거됐다. 외설 논란에 휩싸인 마 전 교수는 '음란문서 유포죄'로 강의 중 경찰에 연행됐고 법정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의 유죄판결을 받았다.
해당 사건으로 '야한 작가'라는 수식어가 붙은 마 전 교수는 재직 중이던 연세대에서도 면직 처분을 받았으며 일부 보수층으로부터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이후 2000년 재임용을 도전하며 재기를 꿈꿨지만 제자의 시를 자신의 시집에 실어 비난을 사는 등 계속된 논란에 극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즐거운 사라 필화 사건 이후 마 전 교수는 "겉으로는 근엄한 척하면서 뒤로는 호박씨 까는 우리 사회의 행태에 시비를 걸어보고 싶었다"며 작품의 집필 의도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지금 이 순간 주위를 둘러 봐라"며 "섹드립(성적인 언행을 뜻하는 신조어)이 난무하는 세상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라 때문에 인생을 망쳤다"고 말했다.
오늘날 '즐거운 사라'는 외설과 예술의 논쟁에 대표적인 예시로 언급된다. 과거와 달리 '섹드립'이 하나의 개그 코드로 분류되는 현 사회에서 대중들은 그를 다양한 수식어로 이야기하고 있다. 일생 야한 작가로만 불려왔던 그의 인생이 재평가 되는 시점이다.
[디지털뉴스국 이유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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