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세계경제는 ‘자유무역과 개방’이라는 한 방향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1992년 미국과 캐나다, 멕시코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맺었고 유럽연합(EU)은 유럽의 경제 통합을 촉진하기 위해 단일화폐인 유로화를 1999년 도입했다. 중국은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면서 글로벌 개방경제 체제가 한층 탄력을 받았다.
하지만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는 30년 가까이 지속된 경제통합과 세계화의 종언을 초래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브렉시트가 본의 아니게 보호무역의 향수를 자극하고 경제 개방과 협력보다는 고립과 배척이 득세하는 ‘신고립주의’를 재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브렉시트 사태가 터지기 전부터 보호무역주의 망령이 꿈틀대고 있었다는 점이다. WTO는 주요 20개국(G20) 국가들의 보호무역주의 조치로 인해 세계경제의 저성장 국면이 가속화하고 있다고 최근 경고했다. WTO는 작년 10월 중반부터 올해 5월 중반까지 G20 국가들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가장 빠른 속도로 반덤핑 조치를 비롯한 각종 보호무역 조치를 쏟아냈다고 지적했다. 이는 5년째 세계 무역 성장이 둔화된 사실과 맥을 같이한다고 분석했다.
글렌 허버드 미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장은 뉴욕타임스에 “브렉시트 투표는 현 글로벌 경제시스템의 실익이 자신들에게 있느냐를 따져봤을 때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는 유권자들의 깊은 불신을 반영한다”고 말했다. 문호를 열면 먹을 파이가 더 커질 줄 알았는데 밀려드는 난민들에게 복지 혜택과 일자리를 빼앗기고 삶의 질은 더욱 떨어졌다는 분노가 영국 유권자들의 EU 탈퇴를 이끌었다는 얘기다. EU에 매년 내는 30조원 규모의 분담금을 자국민들의 복지와 신성장동력에 돌리면 더 잘 살 수 있다는 브렉시트 진영의 논리에도 귀가 솔깃했을 법하다.
이처럼 자유무역의 장기적 혜택보다 눈앞의 이익을 챙기려 하는 보호무역 정서는 대대적인 통상 분쟁 확산을 앞당길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미국은 지난해에 총 64건의 반덤핑과 상계관세 조사를 개시했다. 이는 2001년 이후 14년 만에 연간 기준 최다 건수다. 미국은 올 들어 지난 5월 말까지 36건의 반덤핑·상계관세 조사에 착수해 작년 수준을 넘어설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특히 중국산 제품에 대한 조사는 작년 전체 건수 중 11건에 달했지만 올해는 18건으로 전체 조사 건수의 50%를 차지했다. 한국산 제품에 대한 조사 비중도 한층 늘었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USITC)에 따르면 지난 4월 말 현재 미국이 부과중인 반덤핑관세는 266건, 상계관세는 64건 등 모두 330건이었다. 이 중 중국산 제품에 대한 반덤핑·상계관세가 132건으로 가장 많았고 인도(23건), 대만(22건), 한국(18건), 일본(15건) 순이었다. 아시아 수출국들이 미국의 집중 견제를 받고 있는 셈이다. WTO 상소기구 위원으로 활동한 장승화 서울대 교수의 임기 연장에 대해 미국이 반대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도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차원이라는 해석이 제기된다. 아울러 오는 29일 미국 정부가 발표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평가보고서에 한국 교역을 견제하는 내용이 담길지 주목되고 있다.
미국과 일본 주도 아래 어렵게 합의에 이룬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도 미국의 신고립주의에 막혀 좌초될 위기에 처해있다.
미 대선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과 도널드 트럼프가 경제정책에는 상당한 이견을 보이고 있지만 자국에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TPP를 재협상해야 한다며 부정적 입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주요 치적으로 꼽히는 TPP가 이래저래 난관을 만난 형국이다.
글로벌 환율전쟁의 암운도 갈수록 짙어지고 있다. 여러 중앙은행들이 자국 기업의 수출경쟁력을 방어하기 위해 통화가치를 한층 떨어뜨리기 위한 완화정책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연 80조엔의 양적완화에 이어 마이너스 금리까지 동원한 일본은행(BOJ)은 디플레이션 탈출을 위해 무슨 수단이라도 강구하겠다는 입장이다. 브렉시트 투표로 달러당 엔화값 100엔이 장중에 붕괴되는 충격을 받은 일본은 필요하면 임시 통화정책회의까지 열어 대응할 태세다. 자칫 양적완화 실패론에 직면할 수 있어 주변국 입장을 고려할 여유가 없다는 분위기다.
일본은 미국과의 대립에도 불구하고 필요하면 환율시장 직접 개입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꺾지 않고 있다. 안보법까지 바꿔 동북아에서 미군과 협력을 강화하는 혈맹국이지만, 경제문제에서 만큼은 양보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영란은행도 통화·금융안정을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은행권에 추가 유동성 제공, 기준금리 인하, 회사채 매입을 포함한 양적완화 확대 등의 광범위한 비상계획을 검토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는 브렉시트 후폭풍에 따른 시장 불확실성이 해소되기 전까지 추가 금리인상 행보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월가 일각에선 금리인하 가능성마저 대두되고 있다.
줄리안 이매뉴얼
[뉴욕 = 황인혁 특파원 / 도쿄 = 황형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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