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지가 부산이라는 말에 기분이 묘했어요. 촬영 내내 어렸을 적 생각, 특히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어요. 이제 아버지도, 우리 집도 없지만…. 작가님이 서울 분이시라 표준어로 대본을 주시면 제가 사투리로 바꿔요. 악역이라 거친 표현이 많은데 아버지가 쓰시던 말을 종종 넣기도 해요. 예를 들면 ‘도다리’ 같은…”
3년 전, 배우 김혜은(39)은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었다. 부산에 살던 그의 아버지는 “이런 도다리 같은 게…”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고 한다. ‘도다리’란 ‘어딘가 부족한 사람’을 뜻하는, 익살스러운 부산 사투리다. 아버지의 애정 어린 이 구수한 욕을 김혜은은 극 중 대사로 사용한다.
KBS2 ‘해운대 연인들’은 기억을 잃은 채 낯선 부산에서 사랑하게 된 전직 조폭의 딸(조여정)과 검사(김강우)의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다. 김혜은은 해운대 호텔을 집어 삼키려는 클럽댄서 출신의 육탐희 역을 맡았다. 욕심 많고 포악하지만 화려한 외모를 무기로 삼고 있다.
“완벽하면서도 맛깔스러운 사투리를 구사하기 위해 배우들 모두 애쓰고 있어요. 그 지역의 정서를 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사용하기가 정말 어려워요. 캐릭터 특징상 저는 센 사투리를 사용하는데 실제 부산 여성들이 다 그렇진 않아요. 얼마나 애교가 많은 대요…탐희는 옛날 할머니세대가 쓰는 아주 격한 사투리니 오해마세요~(웃음)”
육탐희의 대사는 본래 서울말이 대부분이었다. 중졸에 부산 디스코 클럽 출신인 탐희는 자신의 과거를 숨기기 위해 서울말을 쓰는 캐릭터. 난감한 상황에 처하거나 과거가 드러나 화가 날 때 자기도 모르게 부산 말을 간간히 사용하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김혜은의 부산 사투리가 워낙 매력적이라 완전한 부산 사람으로 설정이 바뀐 것.
“현장에서 제가 사투리를 쓸 때마다 빵빵 터지는 거예요. 날카로운 제 인상과 달리 알고 보면 무식하고 어이없는 내면을 지닌 탐희, 반전 재미가 있죠. 제가 너무 이미지 신경을 안 쓰니 오히려 감독님이 걱정을 하시더라고요. 굳이 카메라 앞에서 예쁘게 보이고 싶지 않아요. 그냥 육탐희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MBC 간판 기상캐스터 김혜은, 배우로 재부팅되다
“미련 같은 건 없어요. 신선한 멘트를 쥐어짜는 데 한계에 부딪혔고 나를 선망의 대상으로 보는 후배들에게 실망감을 주고 싶지 않았어요. 주어진 시간동안 누구보다 최선을 다했고, 그 능력도 인정받았죠. 당시 많은 스타들을 봤지만 꼭 인기와 행복이 비례하진 않는 것 같아요. 화려함에 대한 덧없음을 그 때 이미 깨달은 거죠.”
김혜은은 지난 1997년 MBC 청주 아나운서 공채 합격한 뒤 8년간 간판 기상캐스터로 활약했다. 2004년 드라마 ‘결혼하고 싶은 여자’에서 명세빈의 친구로 깜짝 출연해 처음 연기를 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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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퇴사를 결심한 그는 이후 3년간의 휴식기를 갖고 연기 공부를 시작했다. MBC 일일극 ‘아현동 마님’을 통해 연기자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일명 ‘배용준 선생님’으로 불리는 유명한 연기 지도 선생님을 만나 공부했어요. 선생님을 만나 제 운명이 바뀌었어요. 눈빛이 좋다는 얘길 듣고 자신감을 얻었고 자유롭게 임했어요. 다행히 좋은 반응들이 있었고 지금까지 쉼 없이 달려올 수 있었죠.”
이후 김혜은은 영화 ‘범죄와의 전쟁’을 통해 본격적으로 배우의 길에 들어섰다. 극 중 나이트 클럽 여사장을 맡은 김혜은은 일명 ‘최민식의 여자’로 강력한 인상을 남기며 충무로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사람들에게 ‘연기 못 한다’고 무시당하고 싶지 않았어요. 클럽 여사장 역할을 소화하기 위해 안 피던 담배를 6개월간 매일 피웠고 모든 행동도 바꿨어요. 내 안의 ‘천박함’을 확인했고 낯선 모습을 확인하면서 혼란에 빠졌죠.”
일종의 쇼크 상태에 빠졌다는 그는 “당시 최민식 선배가 ‘배우로서 누구나 겪는 일. 처음만 극복하면 그간 못 봤던 새로운 평지가 보일 것’이라고 했다”며 “이후 많은 게 달라졌다. 카메라 앞에서 자유로워진 나를 봤다”고 회상했다.
김혜은, 길 잃은 청소년들의 나침반 되다
“청소년 쉼터의 홍보대사 제의를 받고 처음엔 거절했어요. 이미 기아대책 홍보대사를 맡고 있었거든요. 사연을 들어보니 너무 딱하더라고요. 그냥 놔두면 끔찍한 사회 범죄로 번질 수 있지만 적절히 치료만 한다면 이들은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어요. 막상 맡고 보니 할 일이 많네요.”
‘놀이터’로 비유된 한국 사회는 자살률, 이혼율, 사교육비, 저임금 및 비정규직 노동자비율, 근로시간, 산재사망자 수 등의 지표에서 OECD 국가 중 1위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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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아픈 사연을 지닌 가출 청소년들이 많아요. 대부분 이혼가정의 아이들이죠. 부모의 무관심과 회피가 문제를 키우는 셈이죠. 청소년의 정신은 결국 우리 사회의 미래인데…. 어른들이 나서지 않는다면 미래 범죄, 암울함은 더 커질 거예요. 단순히 가출 청소년이라는 시선을 바꾸고 근본적인 해결안을 찾아야 해요.”
서울대 성악과 출신인 김혜은은 모교 교수님과 학생들은 물론 관계자들과 만나 바람직한 해결 방안을 모색 중이다. 한 달에 한 번씩 서울 경기 지역의 청소년 쉼터를 돌면서 음악회를 열고자 추진 중이지만 아직 제약이 많다. 대신 주 2회 이상 쉼터를 찾아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고민 상담에 주력하고 있다. 동시에 쉼터가 기업으로부터 더 많은 후원을 받을 수 있도록 고군분투 중이다.
“현재 청소년 쉼터는 사회복지 시설로 등록이 안 돼 있어 기업 후원을 제대로 받지 못해요. 사회복지 시설로 등록이 될 수 있도록 관계 당국에 호소를 한 뒤 많은 기업들이 후원에 나설 수 있도록 홍보에 힘을 쏟을 예정이에요. 특히 청소년은 유권자가 아니기 때문에 정치인들의 관심 대상에서 멀어져 있죠. 일부 지역 축제엔 억대 지원금이 나와도 쉼터를 위해서는 나오지 않는 게 현실. 눈 앞의 이익도 중요하지만 정신적인 가치에 대한 투자도 분명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현재 ‘해운대 연인들’ 촬영으로 인해 공간의 제약을 받고 있는 김혜은은 촬영지인 부산을 중심으로 여전히 주 2회 이상 쉼터의 아이들을 만나고 있다. 향후 아이들과 나눈 대화들과 그들의 사례를 엮어 책 혹은 다른 방법을 동원해 이를 체계적으로 알릴 계획이다.
“집에서 보호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쉼터에서라도 제2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고 싶어요. 청소년 복지 관련, 적극적인 방안들이 고안될 수 있도록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해요. 아이들에 대한 투자는 결코 아까운 게 아니라는 걸 많은 분들이 알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김혜은은 마지막까지 청소년 문제에 대한 사회전반의 애정어린 시선을 강조했다.
“단 한 번도 스타를 꿈꾼 적은 없어요. 주목 받고 싶은 욕심도 없고요. 하지만 제가 배우가 아니었다면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조차 없었겠죠. 문제를 안 이상 방관할 순 없어요. 앞으로도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청소년 문제에 힘을 쏟을 생각입니다. 따뜻한 시선으로 봐주세요.”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한현정 기자 kiki2022@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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